현대 한국문학을 꾸준히 찾아읽고, 중학생 이후 멀어졌던 독서를 다시 취미로 만들 수 있었던 계기는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이었다. 서른 페이지 남짓의 단편마다 꽉 찬 디테일을 한 겹씩 들추면서, 유려하게 구사된 모국어를 더듬으면서 강렬한 재미를 느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다니던 대학교의 극작수업에서 소설을 희곡화하는 수업을 했는데, ⟪바깥은 여름⟫에 수록된 <입동>을 과제로 제출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내게 큰 인상을 남긴 김애란 작가가 오랜만에 장편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교보문고로 달려갔다.
가장 인상 깊은 한 구절은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라는 <베르세르크>의 명대사가 여기저기서 남발되는 게 불편할 때가 잦았다.
물론 사람이 자신의 삶을 마주하고 극복하는 순간도 필요하지만, 도무지 삶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괴로울 때는 그저 피하는 때도 필요하다.
낙원을 바라서가 아니라, 한 발짝이라도 삶에서 더 내디디고 싶으니까.
삶의 서사가 뚜렷한 이들이라면 기도한 시간을 양분삼아 보란 듯 성장할 수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들과 ⟪이중 하나는 거짓말⟫의 취약한 청소년들은 그 기도가 언제 끝날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워한다. 설사 끝나더라도 또다시 비정한 삶의 시간을 마주하기를 깊이 두려워한다. 웅크린 몸과 내리깐 시선이 한 없이 가라앉는 경험을 나도 해봤기에, 그 두려움과 좌절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다시 삶의 궤도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고, 그 계기는 주로 기도하는 손을 말없이 잡아주는 다른 누군가이다.
낙원은 없다느니하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지 않고, 그저 함께 헤매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는 누군가.
그 과정이 희생이 아니라, 서로를 같이 구원하는 일이라고 이해하는 누군가.
헤매고 더듬은 끝에, 다시 '꿈에서 현실로 돌아온' 이들과 아직 괴로운 기도를 하는 이들 모두에게 전하는 다정하고 굳건한 응원.
세밀한 내면과 행동을 쌓아올린 인물들이 얽히는 이야기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단편에서 굉장히 큰 흡입력을 보여주는 김애란 작가인데, 장편에서는 그 힘이 좀 떨어진다고 느끼기도 했다.
내면에 주로 집중하는 방식 자체는 좋은데, 긴 호흡이 필요한 장편에서는 다른 시도도 함께 있었다면 더 집중해서 따라갈 수 있었을 듯 하다.
그럼에도 구매를 후회하진 않은 작품! 즐거운 독서였다.
도서정보 (출처 : 교보문고)
저자 : 김애란
발행(출시)일자 : 2024년 08월 27일
쪽수 : 240쪽
출판사 : 문학동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고등학교 2학년인 세 아이가 몇 가지 우연한 계기를 통해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한 후 서서히 가까워지며 잊을 수 없는 시기를 통과해나가는 이야기이다. 소설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시간대는 두 달 남짓한 짧은 방학이지만, 우리는 세 아이의 시점을 오가면서 서서히 진실이 밝혀지는 독특한 구성을 통해 현재에 다다르게 된 인물들의 전사를 총체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결코 길지 않은 이 소설이 무엇보다 광활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라는 문제 앞에서 깊이 고심한 끝에 완성된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소설의 구조에 대한 고민이 어떻게 인물에 대한 이해와 연결되는지를 마지막에 이르러 감동적으로 제시한다. “누군가의 눈동자에 빛을 새겨넣을 때 붓 끝”에 “아주 적은 양의 흰 물감”(196쪽)을 묻혀야 하는 것처럼, ‘소량이지만 누군가의 영혼을 표현하는 데 꼭 필요한 그 무엇’처럼, 김애란은 누군가의 영혼을, 그러니까 결코 진부하게 요약될 수 없는 인물의 다면적이고 중층적인 삶을 특유의 간결하고 여운 가득한 문장을 통해 그려 보인다.